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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은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약 26년간(993년~1019년) 고려와 거란(요) 사이에서 벌어진 세 차례의 전쟁을 의미합니다. 고려는 거란의 침공에 맞서 서희의 외교적 기지와 강감찬의 군사적 전략을 통해 국토를 지켜냈고, 최종적으로 귀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두며 거란의 침략을 종식시켰습니다.

1. 고려 거란 전쟁의 배경과 원인
1) 거란(요)의 성장과 고려에 대한 압박
거란(요나라는 916년 야율아보기가 세운 북방의 강국으로, 10세기 후반에는 중국 북부의 송나라를 위협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는 송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거란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2) 고려의 강경한 대응
고려의 성종(981~997년)은 거란의 요구를 거부하며 북방 방어를 강화했습니다. 성종은 압록강 유역에 방어 기지를 세우고 국방력을 강화했으며, 거란과 전쟁을 피하기보다는 맞서 싸울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이로 인해 993년, 거란의 첫 번째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2. 고려 거란 전쟁의 전개 (1차~3차 전쟁)
1) 1차 고려-거란 전쟁 (993년) - 서희의 외교 승리
993년, 거란의 소손녕이 8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고려군은 서경(현재의 평양)까지 밀리며 위기에 처했지만, 고려의 명재상 서희가 나서면서 상황이 반전되었습니다.
- 서희의 담판: 서희는 거란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이며, 고려가 송나라와 단절하고 거란과 친선 관계를 맺겠다고 약속했습니다.
- 대신 고려가 지금의 평안도 지역(압록강 동쪽)까지 차지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이로 인해 고려는 전쟁 없이 영토를 확장하는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2) 2차 고려-거란 전쟁 (1010년) - 개경 함락, 현종의 도피
- 1010년, 고려의 현종(재위 1009~1031년)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내란이 발생했고, 이를 빌미로 거란의 황제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다시 침공했습니다.
- 거란군은 개경을 함락하고 고려 왕궁을 불태웠습니다.
- 고려의 왕 현종은 나주로 피신하여 전열을 정비했습니다.
- 고려는 정면 대결을 피하며 장기전을 유도하였고, 결국 보급이 끊긴 거란군은 스스로 철군해야 했습니다.
3) 3차 고려-거란 전쟁 (1018~1019년) - 강감찬의 귀주대첩
1018년, 거란의 황제 성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이 맞섰고, 전세는 완전히 고려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 귀주대첩의 대승: 강감찬은 거란군을 유인하여 물길을 건너게 한 뒤 기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 귀주(지금의 평안북도)에서 고려군은 철저한 매복 작전을 펼쳐 거란군을 섬멸했습니다.
- 거란군은 10만 명 중 단 2천 명만이 살아 돌아갔고, 고려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3. 고려 거란 전쟁의 결말과 영향
1) 고려의 승리와 국방 강화
고려는 3차 전쟁을 통해 거란의 침공을 막아냈으며, 이후 천리장성(압록강~동해안)을 축조하여 국경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2)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
- 거란은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했으며, 이후 송나라와의 관계도 악화되었습니다.
-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를 유지하면서도, 독립적인 국가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습니다.
3) 고려식 외교 전략의 성공
- 1차 전쟁에서는 서희의 담판으로 전쟁 없이 영토를 확장했고,
- 2차 전쟁에서는 장기전 전략으로 거란군을 물리쳤으며,
- 3차 전쟁에서는 강감찬의 전술로 완벽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결론: 고려 거란 전쟁이 남긴 의미
고려 거란 전쟁은 단순한 국경 전쟁이 아니라, 고려가 동아시아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고려는 외교적 협상과 군사적 대응을 적절히 활용하며 국토를 지켜냈고, 결국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자주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2024년, 고려 거란 전쟁을 다시 돌이켜보면, 이는 우리 역사 속에서 전략적 사고, 외교적 지혜, 군사적 용기가 결합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국제 정세 속에서도 고려의 대응 방식은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